루이나이웨이. 전 세계 여자 바둑 기사 중 최초로 9단에 오른 기사. 1983년부터 2013년까지 30년간 여자 기사 세계 1위. 2000년 한국 국수전에서 이창호 9단, 조훈현 9단을 꺾고 여자 기사 최초로 타이틀을 따내 큰 충격을 안겼던 바둑계의 철녀. 그녀는 1980년 18세의 나이로 중국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승승장구했지만, 1987년 중국 싼샤에서 열린 중일바둑대회 기간에 일어나 작은 사건으로 바둑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규율 위반으로 중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바둑을 두기 위해 일본, 미국을 떠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99년, 그녀는 드디어 한국 기원으로부터 객원기사 자격을 얻어 프로기사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책은 한국에 정착하게 된 그녀가 담담하게 털어놓는 인생이야기입니다. 오로지 바둑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이어간 삶의 여정. 그 진솔한 삶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여러분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바둑뿐이었으며, 잘할 수 있는 것 또한 바둑뿐이었다. 그렇지만 할 줄 알고, 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둑을 계속해야 하는 확고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먹구름이 머리 위를 누르는 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내가 바둑을 계속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까지의 고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바둑판을 바둑돌로 채워갈 때면, 바둑을 두고 왜 천하일색 양귀비의 치마 잡아당기기보다 즐겁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둑을 두는 순간에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바둑과 나는 이미 뗄래야 벨 수 없는 한 몸인데 왜 억지로 바둑과 떼어놓고 내 미래를 생각하는 거지? 나는 마음을 굳혔다.
바둑을 천직으로 여겼을 것 같은 그녀가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바둑을 계속 두기로 마음먹었는지를 보면서, 업(業)과 진로가 고민될 때 어떤 것이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건 그것을 얻을 생각만 할 때는 더욱 멀어지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바둑을 처음 시작하고, 1980년 국가대표팀에 들어오기까지 그녀의 바둑은 비교적 순조로운 항해였습니다. 순풍은 계속 불었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갑니다. 하지만 1982년에서 1985년까지 4년 동안 전국 개인전 우승은 계속 바뀌는 사이 준우승은 항상 그녀의 차지였고, 어느새 그녀는 '만년 2등'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그녀는 개인전을 앞두고 제2회 중일 슈퍼대항전이라는 큰 시합에서 아쉽게 패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해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았고, 우승은 기쁘고 대단한 일이지만 우승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개인전 우승을 차지합니다. 저 문장은 그녀가 그 과정에서 느낀 소회입니다.
승리의 순간에 오래 머물 수 없듯이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꿈꾸는 자는 패배의 순간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자위로 그나마 나는 자신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2000년 국수전에서 조훈현 9단을 꺾고 타이틀을 따냈던 그녀는, 그 이후 한국기사와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1년간 열린 모든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토록 어렵게 얻은 좋은 기회에서 그녀는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패배의 쓴맛과 굴욕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했지만, 그녀는 위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가다듬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종종 잊고 지냅니다.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고 싶을 땐, 그 사실을 떠올려 봐야겠습니다.
과거에 내 성적이 좋았던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게 왔단 좋은 운이 그동안 나의 결점과 부족한 점을 덮어줬던 것이다. 내 결점은 하나도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고 그대로 있었지만 운이 좋아 그동안 약점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내 문제점이 훤히 드러났을 때조차 상대방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별다른 노력도 없이 어려운 국면을 슬쩍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운이 따라주지 않을 때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결점이 불거지면서 프로기사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자신감마저 상실하게 된다. 순전히 운에 의존하는 바둑을 뒀던 내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고된 행진을 하고 있는 현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내 모습이야말로 화려한 빛깔을 뽐내며 빠르게 부풀어오르던 거품이 걷힌 본연의 모습이다. 비록 늦게나마 그 사실을 아프게 자각했으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노력뿐이다. 설사 지금부터 얻는 결과가 비록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온전히 내 의지로 얻어낸 값진 것이다.
그녀가 한국에 온 첫 해는 성적이 무척 좋았지만, 그후 2년 동안은 시합에서 줄곧 졌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바둑에 온 힘을 쏟아부어도 결과는 항상 '패배'였던 나쁜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이러다 패배에 익숙해져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오던 순간, 그녀는 위와 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도 긴 슬럼프에 괴로워질 땐, 생각을 한 번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요?
복기를 하면 패배의 원인은 명확히 알게 되지만 때로 한 시합에서 두 번 지는 것과 같은 뼈아픈 고통도 감내해야 할 때도 있다. 그날의 내가 그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바둑기사들은 그 과정을 묵묵히 견디며 자신들의 바둑 여정을 다시 정비한다.
2000년 파리에서 열린 LG배 세계 바둑왕전 8강전. 앞서 언급했듯이, 2000년 국수전 이후 세계대회에서 그녀의 성적은 부진했고, 이 시합에서 이세돌에게 패배하며 대회를 마무리합니다. 그녀는 기억에 오래 남는 참담한 패배라고 심정을 밝혔지만, 복기를 거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실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 그 일을 두 번 겪는 것처럼 고통스럽겠지만, 그 실패와 감정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기사인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처럼 경기 때마다 승부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내 모습에 대한 성찰이랄까 회의랄까, 나의 내면을 아프도록 들여다보게 하는 서늘한 자아와 마주치게 된다. 그때마다 내가 늘 바라는 바대로 한국의 젊은 축구선수들 역시 자신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살고 있는 축구선수로서의 삶이 그들의 정신까지 윤택하게 할 수 있기를 잠깐이나마 기원했다.
뜨거운 월드컵 열기가 가득했던 2002년 대한민국, 축구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 역시 한국에 지내는동안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찾아보며 응원할 정도로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듭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살고 있는 삶은 정신까지 윤택하게 한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평생 바둑에 몰두해 온 그녀가 인생의 여정 끝에 찾은 진리가 아닐까요? 그녀의 메시지가 더 큰 울림과 공명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여자 바둑 기사 GOAT으로 손꼽히는 그녀도, 부진과 슬럼프 속에 괴로워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저에게는 인상깊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건, 바둑을 사랑하는 마음, 그저 바둑을 계속 둘 수 있다는 즐거움이었습니다. 한평생 무엇인가 에 몰두하고 전념해 낸 인간이 다다른 경지에, 경외심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위 내용은 책 '우리 집은 어디인가1(저자 루이나이웨이, 옮긴이 전수정,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요약, 발췌한 내용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